금곡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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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과 역사

금곡사(金谷寺)는 신라 진평왕때의 대승불교 세속오계를 제정한 최초의 학승 원광법사(555~638, 추정)가
13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된 이후, 30세인 585년경 삼기산(계절에 따라 금곡산, 비장산)에 창건하고 수도하였다.

원광은 34세에 주술을 좋아하는 한 승려가 와서 가까운 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원광이 그 승려의 잘못을 타일렀으나 듣지 않다가 화를 입어 죽었다. 이에 불교공부를 더 깊게 하여 사람들을 제도하겠다고 발심하고 589년(진평왕 11)에 진(陳)나라로 들어가 11년을 머문 뒤 진평왕 22년에 귀국하였다. 638년(선덕여왕 7)에 원광이 황룡사에서 입적한 뒤 명활산에서 장사를 지내고 서쪽에 위치한 금곡사에 부도(금곡사지 원광법사부도탑, 경북문화제자료 제97호)를 건립하게 되며 (삼국유사), 밀교승려 밀본이 주석하였다.

이후 임진왜란(1592~1598)때 일본인으로 인하여, 절과 부도는 파괴되고 도굴되었으며, 1935년경 지금의 금곡사 주지 청운스님의 조모 고창(高敞) 오씨(吳氏) 순이(법흥화보살)가 절터 인근으로 나물을 채취하러 갔다가 목탁소리를 따라 지금의 금곡사 터를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소실된 절터에 풀이 우거지고, 부서진 탑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오보살이 13세 무릅 월성(月城) 손씨(孫氏)홍익에게 시집을 왔을때 3대째 외동만 출산한 자손이 귀한 집안이라 부처님의 소리로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금곡산 탑골(금곡사의 옛명칭)에서 토굴 같은 절을 이루고 기도를 드리며, 주변 보살들과 함께 법당과 산신각을 지으며 원광의 자취와 역사의 명맥을 이어오게 되었다.

오보살의 기도가 마을에 퍼지면서 인근 보살들도 함꼐 기도를 올리게 되었고, 그러던 중 안동(安東) 권씨(權氏) 순철이 18세 무렵 찾아와 함께 기도를 청하고, 오보살의 보살핌아래 기도와 수양을 하며, 도를 깨우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순철은 몇 해 지나지 않아 도량과 인연이 다되어, 인근에 절을 창건 하게 되었다. 이후 오보살이 금곡사를 지키며, 사위 정소금(효각스님)을 승려로 출가시켰고, 몇 해가 지나 금곡사에서 수양을 하였다.

당시에는 금곡사의 정확한 유래를 찾지 못해 한 귀인이 허공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운기가 절터를 자욱하게 매우는 모습을 보고 백운담이라 칭하였는데, 이에 금곡사는 한동안 백운암으로 불리었다.

그 후 오보살은 81년(향년 76세)임종을 맞이하게 되면서 효각스님도 하산 하게 되었으며, 이 무렵 다른 보살과 지인에게 금곡사를 맡기지만 대가 약하고 힘에 부추겨 몇 해 지나지 않아 모두 하산을 하게 되었고, 주변 신도들의 간청으로 인하여 결국 오보살의 장남인 월성(月城) 손씨(孫氏) 일호가 1983년부터 금곡사를 지키고 수양을 하여 왔다. 1985년 가족들도 함께 입산하게 되었으며, 역사를 다시 되짚어 당시 백운암의 지명을 지금의 금곡사로 변경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오보살의 손자인 현주지 청운스님도 양친과 함께 금곡사로 들어와 수양을 하며 1993년 옛 법당을 재건축하고, 금곡사를 보수 관리하여 왔다. 이후 미타종 교육원장이셨던 월정스님(現 : 미타종 종정)께서 지리산 기도중 원광법사님 부도를 친견하라"는 현몽으로 금곡사를 찾게되었고, 청운스님은 월정스님에게 수계하여 청운(靑雲)"이라는 법명을 받고 불법을 익히며, 미타종 단기 불교대학을 1기로 수료하며 금곡사의 주지스님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1997년에는 파괴된 금곡사지원광법사부도탑을 복원하였으며, 1차 전기공사를 시작으로 2008~10년 2,3차 전기공사로 광명의 등불이 완공되었다.

2009년~현재까지 도로포장공사 등 지속적인 보수와 관리로 지금의 금곡사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